▲ 참가자들이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 최종견해 이행 현황과 제고 방안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가 장애인권리협약(이하 권리협약)에 기반해 한국에 내린 권고사항에 대해 정부는 이행 현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발표했지만, 국내·외 장애계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지난 29일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 법무법인 태평양, 한국장애포럼 등이 공동 주최한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이행 강화를 위한 국제심포지엄’이 여의도 글래드 호텔에서 열렸다.
한국은 지난 2008년 권리협약 비준을 준비하고, 2009년 발효했다. 이에 지난 2011년 6월 첫 번째로 국가·민간 보고서를 제출했고, 2014년 9월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에(이하 위원회)에 심사를 받았다.
위원회는 심사를 통해 한국에 ▲협약의 인권적 접근과 조화되는 방향으로 장애인복지정책 추진 ▲자립이 가능하도록 사회부조프로그램 실시 ▲통합교육의 효과성 연구 실시 ▲탈시설 대책 마련 등 총 58개의 권고사항을 전했다.
이에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는 현재 위원회가 제시한 58개의 권고사항 중 한국 상황을 고려해 52개 수용, 4개 불수용, 기타 2개로 분류한다는 방침이다.
권리협약 이행 사항을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위원회가 내린 서비스 전달체계 분야에서 ‘ 약의 인권적 접근’과 조화되는 방향으로 장애인 복지정책을 추진하라는 권고에 대해 복지부는 의학 기능 제한, 개인 욕구, 사회 환경 등을 모두 고려해 장애인에게 복지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장애등급제 개편을 추진할 예정이다.
또한 통합교육의 효과성 연구 실시 권고에 대해서 교육부서는 통합교육의 효과성을 점검하고 발전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연구용역을 실시하고 있다.
인권분야에서는 장애인 거주시설의 인권침해, 장애인에 대한 강제노역, 정신장애인에 대한 강제 입원과 치료 등 위원회의 우려에 대해 복지부는 고용노동부와 관련 법·제도를 정비해 장애인의 인권보호를 위해 노력할 예정이다.
▲ 보건복지부 장애인권익지원과 강인철 과장 |
또한 앞으로 지난 1월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를 통해 수립된 ‘위원회 권고사항 이행계획’에 대한 이행 현황을 점검하기 위해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나 장애인정책조정실무위원회를 통해 권고별 이행사항을 점검해 나갈 예정이다.
이에 오는 2019년 1월로 예정된 제2·3차 병합 당사국보고서 작성시 장애인단체와 장애인 관련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할 계획이다.
복지부 장애인권익지원과 강인철 과장은 권고사항 이행 현황을 발표하며 “위원회의 권고사항은 13개 기관과 관련됐으며, 장애인의 모든 삶의 영역에 대한 광범위한 사항이 포함됐다.”며 “권고사항에 대한 이행을 높이고, 장애인의 권리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중앙부처 뿐만 아니라 모니터링 역할을 수행하는 국가인권위원회와 장애인단체 역할도 클 것이라 생각한다.”고 앞으로 권고사항 이행에 대해 정부뿐만 아니라 관련 단체들이 함께 협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당사자 현실’ 빠진 정부의 권리협약 이행 계획
복지부는 심포지엄을 통해 권고사항 이행 현황을 발표하고 앞으로 계획을 전했지만, 이에 대한 국내·외 장애계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 국제장애연맹 빅토리아 리(Victoria Lee) 인권 담당관 |
국제장애연맹 빅토리아 리(Victoria Lee) 인권담당관은 위원회 권고사항을 모두 수용하지 않는 한국 정부의 계획을 지적했다.
리 담당관은 “위원회의 최종 견해에 대해, 복지부는 몇가지를 제외하고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며 “그런데 사실 인권조약을 보면 비준을 하고나서 당사국은 최종견해, 권고사항에 대해 ‘수용’, ‘불수용’한다는 것을 발표할 권리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권고 사항은 정치 판단에 의해 수용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어 “어떤 권고 사항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 말은 즉, 어떤 권리는 보장하고 어떤 권리는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권리는 취사선택할 문제가 아니다. 모든 권고사항은 장애인의 권리와 관련돼 있기 때문에 위원회는 수용되지 않는 권고사항에 대해 계속해서 모니터링을 실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장애계 단체도 복지부의 이행 계획이 장애계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그저 ‘보여주기식 계획’이라고 비판했다.
▲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정지영 사무국장. |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정지영 사무국장은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에서 발표된 정부의 이행계획을 살펴봤다.”며 “이행 계획을 수립함에 있어서 권고사항이 담고 있는 의미를 알고, 이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이 있어야 하는데, 정부의 수용은 당사자 입장에서 이것이 과연 권고사항 이행계획인가 의심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특히 정 사무국장은 권고 사항의 주요 내용인 장애등급제 개편을 정부가 제대로 이행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에 의료 관점에서 장애등급제를 규정하는게 아닌 개인·사회 환경 등 모든 사항들을 고려한 맞춤형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사무국장은 “정부는 오는 2017년 장애인복지법 개정을 통해 등급제 개편을 추진할 계획.”이라며 “그러나 협약에서 권고한 내용의 핵심은 의료 모델 중심의 등급제에서 벗어나 맞춤형 서비스 체계를 지원하라는 것이다. 이 뜻을 알지 못하고 정부는 장애인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늘리거나 개인별로 특성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중·경증의 새로운 등급제로 서비스 제공하려 한다. 이는 권고사항을 수용 했다고 볼 수 없다.”고 꼬집었다.
아울러 현재 권고사항에 대해 당사자들은 제대로된 자료를 찾을 수 없고, 당사자들이 이행 과정에 참여하고 있지도 않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정 사무국장은 “우리가 그동안 수없이 제기했던 권리 문제가 얼마나 반영됐는지 궁금하지만 알 수가 없다.”며 “지금 정부가 협약에 대해 이행하고 있는 내용들은 대단히 형식적이다. 정부가 이미 하고 있는 것들을 권리협약 기준에 끼워맞춘 것일 뿐이다. 장애인권리협약의 주체인 장애인이 협약을 너무나 멀게만 느껴진다고 말하는 것은 협약이 한국 장애인의 삶에 제대로 스며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당사자가 배제된 한국 ‘장애인권리협약’의 씁쓸함을 전했다.
권리협약 이행 위해 모니터링 시스템 구축이 우선
이에 장애계 단체는 효율화된 권리협약 이행 강화를 위해 모니터링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 전국장애인부모연대 김기룡 사무총장 |
전국장애인부모연대 김기룡 사무총장은 권리협약의 국내이행과 감독 내용이 있는 제33조의 규정에 따라 한국도 협약을 이행하고 감시하기 위한 특별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주장했다.
현재 한국의 독립된 모니터링 기구 역할은 인권위가 맡고 있다. 인권위는 장애인 차별에 대한 진정사건을 담당하는 부서가 독립 기구의 실무 역할도 함께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 차별 진정 사건이 해마다 수백여건 씩 늘어나고 있음에 반해 장애인차별조사과의 인력은 몇 년 째 증원되지 않고 있다.
김 사무총장은 “현재 인권위 장애인차별조사과에 협약의 이행 감독까지 담당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다.”며 “협약에 대한 독립기구로서 실질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장애인차별조사과 내에 인력을 충원해 협약 관련 업무 담당자를 배치하거나 협약 관련 팀을 별도로 구성하는 등의 행정 지원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김 사무총장은 모니터링 체계 구축을 위해 △모니터링 기구 설치·운영 △모니터링 지표 개발 △모니터링 운영 매뉴얼 개발 △모니터링 운영 계획 수립 등의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김 사무총장은 “협약의 모니터링에 있어서 협약에 의해 영향을 받는 장애인, 장애인가족, 장애인 단체 등이 협약에 따른 장애인의 권리와 당사국의 의무에 대해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모니터링 과정에서의 참여, 협약에 대한 다양한 의견 개진 활동 등과 같은 역할을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전했다.
한편 심포지엄이 끝난 뒤 질의응답시간을 통해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최재민 활동가는 빅토리아 리 인권담당관에게 최근 한국의 시설 내 인권 침해 등에 대해 설명했고, 이에 대해 리 인권담당관은 한국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 활동가는 “최근 전국 각지 시설에서 인권 유린, 침해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며 “시설 거주인들은 각종 폭력에 노출돼 있지만, 사건이 발생해도 가해자의 처벌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심지어 사건 처리 과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다른 시설로 이동해 살기도 한다. 국제장애연맹의 인권담당관으로서 한국의 시설 내 폭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고 질문했다.
이에 리 인권담당관은 “시설 내 폭력은 인권 침해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라며 “폭력 자체가 형사처벌이 될 수 있는 요소다. 그런데 왜 한국은 형사상의 처벌이 안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울러 복지부는 이 사건에 대해 지자체 소관이라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정부가 책임지지 못하는 시민이 어디 있는가. 지자체, 시설 내 장애인도 모두 인권이 있는 시민이다.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또한 한국의 장애인 현실이 우리가 생각하는 장애인권리와 격차가 큰 것 같다. 앞으로 한국이 권리협약 당사국으로서 책임있는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이행 강화를 위한 국제심포지엄 참가자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