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성장애인과 ‘자기결정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의적 권리임을 기억해야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18-03-16 14:34:47
모든 이론은 인간 사회의 보편적 진화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특수 교육의 이론 역시 장애인들이 생존하는데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 중입니다.
예전의 특수교육은 이론적 학설에 의한 페이퍼상의 교육적인 측면이 강세였다면, 최근에는 ‘개인으로서의 나’에 중심이 맞춰진 자의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당위성과 방법에 대한 셀프케어로서의 교육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특히 ‘자기결정권’이라는 대한민국 헌법상의 권리가 존재함을 우리 장애인들이 정확히 인식하도록 하고,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일한 주체적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교육하여, 장애인 당사자가 스스로 자신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고,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고,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살고자 하는 의지’에 동기부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자폐성장애가 있는 스무 살이 된 아들이 있습니다.
15년 전, 아들이 6살 무렵 진단을 받았던 그 시절의 자폐에 관한 교육이란, 자폐적 특성이 고착되지 않게 모두 없애 버리는 것이 목표인 ‘치료’라는 단어가 붙은 교육이 중심이었습니다.
당사자의 개인 특성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 자폐라는 덩어리로 뭉뚱그려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리모콘 조종의 로봇 같은 양태의 자폐성장애인이 세상에서 반기는 성공적인 치료 효과가 있는, 흔한 표현으로 ‘상태가 좋다’였습니다.
그리고 유독 자폐를 설명할 때는 ‘스펙트럼’이라는 괜히 복잡해 보이는 단어로 자주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한 어미 자식도 아롱이다롱이...라는 속담도 있듯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법인데 자폐라서 ‘스펙트럼’일까요? 본디 모든 인간은 ‘스펙트럼’ 아닐까요?
그런데 요즘 고무적인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자폐성장애인에 대해 ‘개인적 특성’을 중심으로 한 각도로 다시 이해하자는 취지로 당사자는 물론이고 부모나 교사나 조력자들에게 여러 가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데, 그 중 ‘당사자의 인권’을 조명한 ‘자기결정권’이라는 것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아들이 학년기를 보내던 그 시절에는 거론된 적도 없고 들어 본 적도 없는, 자폐성장애인의‘자기결정권’이라는 것이 부각되는 최근 움직임이 반갑기도 하고 한편 야속하기도 합니다.
‘야속하네... 아쉽네... 진작 가르쳐주지...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탓으로, 대상 없는 푸념을 늘어놓고 있는 저의 현명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지난 시간을 고백할까 합니다.
아들이 특수학급이 있는 일반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의 일입니다.
중학교와는 또 다르게 고등학교의 분위기는 가볍지 않았습니다. 대학입시라는 목표가 있으니 교사나 학생들이나 긴장감으로 굳어있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게다가 고등학교의 신학기 3월은 학생들의 수업 분위기를 조성하느라 선생님들도 평소보다 더 엄하게 수업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그런 분위기의 교실에서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어렵기 만한 교과서를 들여다보고 있어야 하는, 특수학급에 입적된 특수학생인 우리 아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정말 ‘죽을 맛’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입학 후,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부터 아들은 학교가기 싫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특수학급은 좋은데 통합의 원반이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등교 때마다 현관에 서서 통합반 하소연이 시작되려하면 엄마인 난 단호하게 시간표대로 통합반은 가야한다, 이건 규칙이며 약속이다, 지금껏 잘 해 왔는데 왜 이러냐 따위의 매몰찬 잔소리를 쏟으며 통합을 강요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 마음 한 구석엔 통합교육이랍시고 원반 가서 비장애 친구들 틈에 앉아 버텨야 한다, 이것은 특수학생의 권리이며 절대로 이 권리를 뺏기면 안 된다, 통합반의 수업이나 행사에 특수학급 학생을 배제시키거나 차별만 해봐라, 가만있지 않을테다... 금방이라도 투쟁에 돌입할 전투적 태세로 항상 과잉방어적인 심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들의 마음고생과 엄마의 잘못된 통합교육관이 엇나가고 있던 어느 날!
내 아이에게, 내 아들에게 충격적인 ‘병’이 왔습니다. 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면역력 저하로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생긴다는 그 ‘병’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동안 아들의 고단함과 괴로움과 스트레스가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부랴부랴 특수학급 선생님과 통합반 담임선생님, 당사자인 아들, 엄마의 심층 대화 끝에 원반 통합 시간표 조정에 들어갔고 원반 수업의 스트레스가 해결된 학교생활이 편했는지, 3개월 후 아들은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병명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아들이 이야기 소재를 칼럼에 쓰는 것은 동의했으나 병명을 밝히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아서입니다.
우리 부모님들 중에는 통합교육에서 원반에 몇 교시나 앉아있는지, 특수학급에서는 몇 교시나 수업을 받는지를 올바른 통합교육의 기준으로 삼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점은 우리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사항인 듯합니다.
저 역시 정작 내 아이가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지는 헤아리지 못한, 그 힘든 시간을 견뎌야만 잘 성장할 것이라고 잘못된 통합교육의 기준을 갖고 있었던 ‘어미의 허영’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아들은, 분명하게 ‘자기결정권’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그 개나 줘 버리고 싶은 표현 ‘상태가 좋은’ 자폐성장애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엄마의 권력이 ‘상태가 좋은’ 아들 스스로 외치며 선택한 ‘자기결정권’을 무시한 것은 이제껏 ‘자기결정권’에 대해 부모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서라고 허접한 변명을 해 보지만 부끄럽습니다.
여기서 우리 자폐성장애인들의 ‘자기결정권’에 대해서 곰곰이 되새겨보자고 제안합니다. ‘자기결정권’이란 의사 표현이 어느 정도 가능한 ‘상태가 좋은’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아무런 지원 없이 혼자서 결정한다는 의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사자가 언어 표현이 불가능한 경우라도 나름의 몸짓이나 표정으로 누군가에게 자기의 생각을 전할 수 있으면 그것도 ‘자기결정’입니다.
생활 속에서 자연스러운 경험을 통해 학습된 ‘자기결정권’이 당사자에 의해 발현 될 수 있도록 자폐성장애인들이 가진 사고나 생각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얼마만큼의 기회를 통해 끌어 낼 수 있는지는 부모와 교사와 사회구성원들이 해 나가야 할 역할이겠지요.
‘자기결정권’의 가능여부의 문제는 장애인 당사자의 상태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가지고 있는 불합리성과 우리 모두가 당사자의 액션에 귀 기울이지 않는 무신경함에 기인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생존력을 위한 심리적 욕구로서의 ‘자기결정권’이 자폐성장애인들에게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의적 권리임을 우리 모두가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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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김은정 (bokttine@naver.com)